20세기 초,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대에 태어난 칼 포퍼(Karl Popper)는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당대 많은 사람은 과학이 인간 지식의 정점에 도달했으며, 철학보다 우월한 도구라고 인식했다. 특히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 명제”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 여겨졌고, 검증할 수 없는 명제들은 무의미하다고 치부되었다. 그러나 포퍼는 이러한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과학이란 무엇이며, 어떤 기준으로 과학적인지 구분할 수 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은 전통적인 과학관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과학이란 검증 가능한 것이 아니라 반증 가능한 것이다”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어떤 이론이나 명제가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참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틀렸다고 판명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퍼는 실제로 과학적 이론들은 전적으로 참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으며, 오히려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안에서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귀납적 추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귀납은 개별적인 사례들을 관찰하고, 그 반복되는 양상에서 일반 법칙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포퍼는 이런 귀납적 방법이 절대적인 진리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수천 번의 백조를 관찰해서 모두 흰색이었다고 해도,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 그 결론은 무너진다. 이처럼 귀납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추론이며, 따라서 귀납으로 세워진 과학 법칙은 언제나 반례에 의해 무너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포퍼는 과학 이론이란 절대적 진리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반증 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과학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이론을 점점 더 정교하게 만들면서, 그 이론이 반증 될 수 있는 상황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과학이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수정하며 ‘진리를 향해’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개방적인 태도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반증주의(falsificationism)”라 불렀으며, 이론은 언제나 시험대에 올라야 하고, 반박될 가능성이 없으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이나 신화에 가깝다고 말했다.
하지만 포퍼의 이러한 견해는 학계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철학자는 포퍼가 과학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정의했다고 비판했다. 어떤 이들은 과학이 단순히 반증 가능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과학은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결과 자체로 진리에 도달해야 한다는 목적론적 관점이었다. 반면, 또 다른 철학자들은 과학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며, 과학은 단지 인간의 관찰과 도구를 기반으로 한 유용한 기술일 뿐, 진리와는 무관한 영역이라고 보았다.
포퍼의 이론은 과학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논점을 던졌고, 이후 과학철학의 여러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과학을 고정된 지식 체계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수정을 거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입장은 과학자들에게 끊임없는 비판과 실험, 그리고 이론적 검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으며, 과학이 일종의 열린 시스템이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포퍼에 따르면, 한 이론이 과학적이라고 간주하기 위해선 반드시 반증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완전한 진리에 다다를 수는 없더라도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다. 즉, 과학은 완성을 향한 종결된 여정이 아니라, 끝없는 수정과 개선의 역사이다. 반면, 반증이 불가능한 명제들은 신앙, 형이상학, 또는 문학적 진술에 가깝다고 그는 보았다. 이런 명제들은 흥미롭고 사유의 폭을 넓힐 수는 있어도, 과학의 범주에는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단순한 철학적 주장이 아니라, 실제 현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과학은 완전한 진리를 제공할 수는 없지만, 이론이 현실에서 끊임없이 검증되고 반박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의미 있는 지식체계로 기능할 수 있다는 그의 입장은 현재의 과학 연구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현대 과학 사례들을 살펴보면 포퍼 이론의 실천적 함의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기후변화, 특히 지구온난화 문제를 보자.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은 인간의 산업 활동이 지구 온도를 상승시키는 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이 이론은 다양한 온실가스 배출량, 해수면 상승, 기온 변화, 빙하 면적 감소 등의 실증적 자료를 통해 지지받고 있지만, 여전히 반증 가능성을 갖춘 이론이다. 예를 들어, 향후 이산화탄소가 증가했음에도 지구 평균기온이 일정하게 유지되거나 오히려 하강한다면, 기존 온난화 이론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온난화 이론은 데이터에 의해 반박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과학적 주장으로 간주한다.
또한 진화론은 대표적인 과학 이론이지만,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반증 가능성 위에서 다듬어지고 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생물 종의 기원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핵심 이론이지만, 초기에는 화석 기록의 불완전함이나 급격한 종 분화 현상 등을 설명하지 못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유전학, 분자생물학, 생태학 등의 발전을 통해 진화론은 보다 정교하게 보완되었고, 여전히 새로운 반례와 데이터를 통해 시험받고 있다. 예컨대 어떤 생물종이 단기간 내 급격한 변화 없이도 완전히 새로운 기관을 획득했다는 증거가 발견된다면 기존 이론은 다시 검토될 것이다. 이처럼 진화론은 완전무결한 진리가 아니라 반증 될 수 있는 과학적 설명 체계다.
양자역학 역시 포퍼의 반증 기준을 충족하는 과학 분야 중 하나다. 전통적인 고전역학의 세계에서는 원자의 움직임이나 물체의 운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여겨졌지만, 양자역학은 이 예측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는 물리학의 혁명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초기에는 많은 과학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러나 반복적인 실험과 반증 시도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예측은 계속해서 정확하게 검증되었고, 이는 이론의 신뢰도를 높였다. 물론 앞으로 양자역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물리 법칙이 등장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 가능성 자체가 바로 이 이론이 과학적임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러한 예시를 통해 볼 때, 과학의 본질은 절대적 진리를 향한 종결된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과 반례 가능성 속에서 더 나은 설명을 향해 나아가는 개방된 과정임을 알 수 있다. 포퍼의 주장처럼 과학 이론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임시적인 승자"일 뿐이며, 그것이 과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언제든지 반박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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