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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자기 이해와 창작 활동

by 청파란 2025. 4. 29.

 

철학에서는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는 ‘진짜 나’를 아는 일이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사회적 역할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본질적인 성향과 태도, 가치관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정직하고, 공정하며,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다음의 네 가지 항목—공정성, 이타성, 무욕(無慾), 타인의 재산을 욕심내지 않음—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해 보라고 하면, 대다수는 자신이 이 기준에 대체로 부합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같은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할 경우에는 훨씬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은 곧잘 부정적으로 해석되며, 그들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예컨대 누군가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 우리는 곧바로 “그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사람이야”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내가 유사한 행동을 했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어”라며 합리화하거나 자기 자신을 쉽게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자기 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이는 철저한 자기 성찰이 결여된 상태에서 판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장점과 의도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결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왜곡된 시선을 인식하고 교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된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선, 잘못된 논리나 추론에 빠지지 않도록 늘 자신의 사고 과정을 점검해야 한다. 편견이나 감정에 휘둘려 판단하지 않고, 가능한 한 사실과 논리에 근거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방법은 바로 자기 내면과의 ‘직면’이다. 기쁨이든, 분노든, 부끄러움이든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을 억누르거나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꺼리는 감정일지라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기 이해의 두 번째 방법은 ‘본심’, 즉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자아를 마주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겪는 수많은 감정, 타인의 기대, 사회적 역할로 뒤엉킨 겉모습을 걷어내고 나면, 그 아래에 있는 고요하고 순수한 본심이 드러난다. 명상이나 사색과 같은 행위는 이처럼 깊은 자기 성찰을 가능케 한다. 그 본심이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이해해야 할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특히 서양 철학에서는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흥미로운 이론 중 하나는, 우리가 물질로 구성된 세상에서 ‘자아’에 상응하는 실체를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감각과 사고가 결합하여 형성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라고 느끼는 존재는 사실 착각이며, 수많은 심리적·지각적 경험의 조합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현대 철학과 심리학에서는 자아를 고정된 실체로 보기도, 단순한 허상으로 보기도 어려운 복합적 구조로 인식한다. 자아는 생물학적 기제, 문화적 경험, 사회적 맥락, 언어와 기억, 감정과 욕망 등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며 형성되는 유동적 구조물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자아란 ‘고정된 나’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과정’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자기 이해를 더 깊이 탐색하기 위해 심리학의 시선으로 시야를 확장해 보자. 철학이 ‘진정한 자신’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강조했다면, 심리학은 그 ‘자신’의 구조를 더 구체적으로 해석한다. 그중 칼 융(Carl Jung)의 ‘그림자’ 개념은 자기 이해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이론이다.

융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성질이나 욕망, 감정을 무의식 속으로 억누른다. 그렇게 억압된 것들은 ‘그림자’라는 심리적 실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 그림자는 단지 부정적인 성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가능성과 창의성, 억눌린 욕구 등도 이 그림자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 하고, 그것이 나와 무관하다고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또는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할 때, 그 안에는 자신의 그림자가 투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진정한 자기 이해란, 이 그림자를 인정하고 그것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한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 정신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이라는 층위로 구분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욕망이나 기억, 충동들이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다가 행동이나 꿈, 실수 말하기 등의 방식으로 표출된다. 즉,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했지?’라는 질문 뒤에는 무의식적 동기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무의식의 작용을 의식적으로 통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융의 그림자와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모두 우리 안에 감춰진 ‘또 다른 나’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겉으로 드러난 자아, 즉 '페르소나(persona)'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가면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억눌린 자아, 본능적 자아가 존재한다. 그림자를 직면하고, 무의식의 소리를 들으려는 용기는 때로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진실한 자기 자신에 도달하게 된다.

 

 

창작 활동만큼 자기 이해가 필요한 분야가 있을까? 창작 활동은 단순히 기술적 표현이 아니라, 창작자의 내면을 외부로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깊은 자기 이해 없이는 진정성 있는 창작도 어렵다. 자기 이해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과 상처를 지니고 있는지, 무엇에 매혹되고 두려워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는 단순한 자기분석이 아니라, 감정의 결을 읽고, 무의식의 흐름에 귀 기울이는 정직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창작자는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진실을 담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융은 억압된 그림자가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억누르거나 무시한 감정, 욕망, 상처들은 종종 무의식 속에서 꿈이나 상상, 이야기의 형태로 다시 떠오른다. 창작자가 그것을 포착해 예술로 변환할 때, 보는 이들은 ‘이건 내 이야기야’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이해는 단지 나를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타인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창작의 다리가 되어준다.

또한, 자기 이해는 창작자의 지속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외부의 피드백, 인기, 인정만을 기준으로 삼는 창작은 쉽게 흔들린다. 하지만 자기 이해를 통해 자신이 왜 쓰고 그리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더 오래, 더 단단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나만의 이유, 나만의 테마를 알고 있다는 건, 내 창작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흔들림 없이 알게 해준다.

무엇보다 창작은 자기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려면, 부끄러운 부분, 상처 입은 부분, 때로는 파괴적이고 모순된 내면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때로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정직한 응시는 놀랍도록 깊고 생생한 표현으로 이어진다. 진짜 감정이 담긴 대사, 누군가를 위로하는 장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장면들은 모두 자기 이해를 통해 길어 올린 것들이다.

결국, 자기 이해는 창작의 토대이자 연료이며 방향이기도 하다. 외부를 모방하는 창작이 아닌, 내면의 진실에서 우러난 창작은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용기다. 그림자와 무의식을 직면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창작자가 만들어내는 작품은 타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