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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샤덴프로이데'로 보는 비교중독과 자기성찰

by 청파란 2025. 5. 3.

 

독일어에는 우리말로 단번에 옮기기 어려운 정서 하나가 있다. 바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샤덴(schaden)’은 피해, 상처, 손해를 의미하고, ‘프로이데(freude)’는 기쁨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샤덴프로이데는 말 그대로 ‘타인의 고통에서 느끼는 기쁨’이다. 어쩌면 조금은 냉소적이고, 약간은 수치스러운 감정.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본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말로는 ‘쌤통’이라는 표현이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 또는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이 감정의 일면을 드러낸다. 타인의 성공이 나의 실패처럼 느껴지고, 타인의 실패가 나의 회복처럼 다가오는 복잡한 감정. 부러움과 시기, 분노와 안도, 정의감과 자기 위안이 뒤섞인 이 기묘한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어딘가에 숨기고 있는 비밀스러운 언어다.

샤덴프로이데는 단순한 악의나 비열함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정서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억울함을 느끼거나, 상대의 태도가 부당했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건 너무나 인간적인 반응일 수 있다. 2004년, 신경과학자 타니아 싱어 교수의 연구는 이 감정에 신경생물학적인 근거를 부여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경제학 게임을 통해 각각 ‘공정한 파트너’와 ‘불공정한 파트너’를 경험하고, 이후 그들이 전기 충격을 받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공정한 파트너가 고통받을 때 참가자들은 뇌의 공감 영역이 활성화됐고, 불공정했던 파트너가 고통받을 때는 쾌락과 보상에 관련된 뇌 부위가 반응했다. 이는 샤덴프로이데가 단순히 ‘고통을 즐기는 성향’이 아니라, 정의감에 기반한 복수심, 사회적 균형을 되찾고자 하는 심리적 기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이 감정은 더욱 은밀하게, 그리고 자주 작동한다. 특히 SNS는 샤덴프로이데의 온상이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성공, 누군가의 실수, 누군가의 추락을 스크롤을 통해 마주한다. '좋아요' 수를 비교하고, 남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의 초라함을 자각하고, 그 자각을 덮기 위해 타인의 실패를 소비한다. 누군가 갑질로 논란이 되었다는 기사에는 “그럴 줄 알았다”, “꼴 좋다”는 말들이 줄 잇는다. 어느새 우리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몇 줄짜리 평가로 환원하며, ‘잘 나가더니 결국 그렇게 됐지’라고 말한다. 실수를 조롱하고, 논란을 기다리며, 누군가의 고통을 보며 안도하는 감정. 그것이 너무 익숙해진다는 사실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이 감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어릴 적 경험이 결정적일 수 있다. 형제자매와 경쟁하며 부모의 관심을 놓고 다투던 시간, 친구들과의 놀이 속에서 공평함에 대해 억울함을 느낀 순간들. 이 감정들은 공정성에 대한 예민함으로 발전한다. ‘나는 노력했는데 왜 저 친구가 칭찬받지?’ 같은 마음은 자라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릴 적 충분히 공감받지 못한 아이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누군가 더 나은 것을 가졌을 때 ‘불공정하다’는 감정이 먼저 튀어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사회 속에서 쉽게 정당화된다. 불공정한 승자, 운 좋은 타인, 나보다 더 가진 사람에 대한 감정이 하나의 집단 정서가 되면, 샤덴프로이데는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감정이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 감정이 지속해서 반복될 때 생긴다. 처음엔 억울함에서 비롯된 감정이지만, 반복적으로 누군가의 고통에 쾌감을 느끼다 보면 타인의 아픔에 무뎌진다. 비극이 소비되고, 누군가의 실패가 ‘재밌는 이야기’가 될 때, 우리는 인간다움을 조금씩 잃어간다. 공감이라는 감정은 근육처럼 훈련이 필요한데, 샤덴프로이데는 그 근육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샤덴프로이데는 단지 타인을 향한 감정만은 아니다. 반복적으로 타인의 실패를 보며 위안으로 삼는 일은,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비교는 방향성을 잃고, 삶은 점점 더 피로해진다. “나는 왜 저 사람처럼 잘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이 “그래도 쟤도 무너졌으니까”라는 안도로 이어질 때, 우리는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진다. 타인의 실패가 일시적인 통증을 덜어주더라도, 그것은 진통제일 뿐이다. 뿌리 깊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감정은 결국 ‘비교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비교의 끝에는 항상 자존감의 저하가 따라온다. 샤덴프로이데가 자주 떠오른다면, 타인의 실패를 바라보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떤 결핍을 마주하고 있는지 되묻는 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감정은 나를 갉아먹는 칼날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샤덴프로이데는 감정의 오류가 아니라, 마음의 신호일 수 있다. “왜 나는 그 사람의 실패가 위로처럼 느껴졌을까?”, “그가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지친 건 아닐까?”라고 묻는 순간, 그 감정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감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무엇에 상처받고 있는지, 어떤 욕망에 눌려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샤덴프로이데는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세계에서 받은 상처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웃을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 웃음을 통해 진짜 내가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를 자각할 수 있을 때, 그 감정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다. 샤덴프로이데는 숨겨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이해받아야 할 감정이다. 그 안에는 고통받은 인간이 살아온 서사와, 정의롭고 싶었던 마음, 비교와 좌절 속에서 견뎌온 내면의 역사가 담겨 있다. 우리가 그 감정을 자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지 않으면서도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