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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카프카 『변신』

by 청파란 2025. 5. 1.

 

실존주의 철학의 계보를 따져보면, 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하여 니체와 하이데거를 거쳐 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실존이라는 주제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지속해서 탐구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실존주의가 철학자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직접적인 철학 이론을 체계화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이라는 방식으로 실존의 깊은 고통과 고독, 그리고 존재의 물음에 응답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변신』은 실존주의적 문제의식을 가장 강렬하고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단지 육체가 변한 것일 뿐, 그는 여전히 사고하고 느끼며 인간으로서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변신은 곧장 주변 세계로부터의 소외와 배제를 낳는다. 가족은 점점 그를 감당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끝내는 그를 외면하고 쫓아낸다. 벌레가 된 아들은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며, 사회 구성원의 기능을 잃은 그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결국 그레고르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가족은 오히려 안도한다.

이 극단적인 서사는 단순히 기괴하고 상징적인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을 통해 철학적으로 깊은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무엇이 존재를 성립시키는가?"라는 질문이다. 인간의 자격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에 있는가, 아니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사회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는가? 고전적인 철학, 특히 데카르트의 존재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문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의심할 수 없는 존재의 증거로서, 사고하는 주체, 즉 '생각하는 나'를 존재의 근거로 삼는 입장이다. 데카르트의 관점에 따르면, 육체가 벌레로 변했을지라도 그레고르는 여전히 ‘존재하는 자’다. 그는 생각하고, 의식하며,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적 존재 이해에 균열을 가한다. 실제로 그레고르는 사고할 수 있지만, 사회는 그를 더 이상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가 감정을 지니고, 희생했고, 가족을 부양해 왔다는 사실은 잊힌다. 오직 외형만이 판단 기준이 되며, 쓸모없어진 존재는 배척당한다. 결국 카프카는 존재란 단지 사고하거나 의식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이 강조하는 존재의 ‘구체성’과 ‘타인의 인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해 “존재란 단순히 ‘있음’이 아니라, ‘있음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로 규정하며, 존재는 언제나 세계 안에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카프카의 『변신』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통찰을 문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레고르는 생각하는 존재일지 몰라도, 세계 속에서 아무도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그는 점차 존재 의미를 상실해 간다. 그는 단지 벌레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말소된 존재이며, 결국 자신도 자기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비극에 이른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 삶에도 깊이 연결된다. 현대 사회는 인간을 기능과 역할로 규정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을 ‘무능력자’, ‘비효율적인 사람’, 혹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는다. 우리가 속한 집단과 사회, 타인의 인식 속에서 존재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되기 십상이다. 카프카는 바로 이 문제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인간 존재가 내면의 자각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통스럽도록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변신』은 결국 실존적 고통과 존재 소외의 극단을 그려냄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유도한다. 이는 단지 한 남자가 벌레로 변한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떻게 인간을 조건적으로 인정하며, 그 조건을 잃은 이들을 얼마나 냉혹하게 버리는지를 되묻게 한다. 또한 카프카는 무의식 속 불안과 죄책감, 책임감이 인간의 존재 감각을 어떻게 갉아 먹는지도 암시한다. 벌레로 변한 이후에도, 그는 가족을 위해 문을 잠그고 조용히 기어다니며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처럼' 행동하려 하지만, 사회는 그런 노력을 받아주지 않는다. 이는 존재가 단지 ‘노력’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에서 "타인의 시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존재의 독특한 조건을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인식을 통해 자신을 ‘객체화’ 당하며 살아간다고 보았다. 즉,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순수한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된 ‘무언가’로 전락한다. 이를 통해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가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는 바로 이 사르트르의 ‘타인의 시선’에 의해 존재를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변신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사고를 유지하며, 가족을 걱정하고,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취한다. 그러나 가족의 시선은 더 이상 그를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의 몸은 이제 기괴한 벌레이고, 그의 의사소통은 이해할 수 없는 괴성일 뿐이다. 어머니는 공포에 질려 그를 피해 도망치고, 아버지는 그를 공격하며 쫓아낸다. 여동생만이 한동안 그를 도우려 하지만, 결국 그녀 역시 “더 이상 그건 그레고르가 아니야”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를 완전히 ‘타자화’하고 배척한다.

이러한 장면은 사르트르의 주장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그레고르는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나’로 존재하지만, 타인의 시선 속에서는 이미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즉,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고, 오로지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존재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조건 속에 갇혀버린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고 말했는데, 그레고르가 처한 상황은 정확히 그 지옥의 한 장면이다. 그는 타자의 인식 속에서 인간성을 박탈당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면, 그레고르는 결국 ‘객체화’된 인간이다. 더는 주체로서 세계를 구성하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비친 그 혐오스러운 외형만으로 평가되며 존재 가치를 잃는다. 그가 여전히 인간적인 감정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한 정체성은 무시된다. 결국 그는 침묵 속에서 점점 자리를 잃고, 끝내는 자신이 사랑했던 가족들에게조차 버려진 채 죽음을 맞는다.

『변신』은 타인의 시선이 어떻게 한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붕괴시키는지를 문학적으로 강력하게 드러낸다. 단지 외형이 기괴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의 눈으로 정의되며, 그 눈이 인정하지 않는 순간, 존재는 급속도로 무너진다. 그레고르는 ‘나’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너’들의 눈은 그를 더 이상 그렇게 봐주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종종 능력이나 생산성, 외모, 성격 등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받고 존재 가치를 규정 받는다. 사르트르가 말한 ‘시선의 폭력’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다.

이처럼 카프카의 『변신』은 사르트르 철학과의 연결을 통해, 인간 존재가 얼마나 타자의 인식에 의존하며 동시에 그 인식에 의해 상처받고 무너질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작품 속 그레고르의 비극은 철저히 ‘관계 속 존재’인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실존적 사건이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시선의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