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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키에르 케고르 실존주의

by 청파란 2025. 5. 1.

 

19세기 초, 한 젊은 사내가 삶의 무게에 눌려 베를린으로 향했다. 덴마크 출신의 청년 키에르케고르였다. 그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깊은 회의와 내면의 불안을 안고, 당대 철학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에서 독일 관념론의 거장 셸링 밑에서 수학했다. 하지만 웅장하고 정교한 철학 체계 속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어떤 불편한 진실을 깨닫는다. 그는 말한다. "철학이 고층 빌딩이라면 그 안엔 사람이 살 수 없다."

이 말은 철학이 아무리 정교하고 거대하게 구축되었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삶에 실질적인 위안과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있다. 철학은 머리로 쌓은 탑이 아니라, 가슴으로 기대 쉴 수 있는 집이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학문을 떠나, 철학을 삶의 고통 속에서 견딜 수 있는 내면의 ‘쉼터’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스승을 떠나, 자기만의 ‘살 수 있는 철학’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이래 철학은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물질과 영혼, 우주와 인간, 존재와 무(無)에 대한 탐구는 그 자체로 지적 쾌락과 사유의 확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은 종종 ‘살아 있는 사람’보다 ‘생각하는 주체’에 집중했다. 추상적 개념과 논리적 체계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개인의 고통은 자주 배제되거나 희미하게 처리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지점에서 철학을 다시 묻는다. 철학은 정말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는 추상적 사유가 인간의 자아를 소외시키는 것에 깊은 경계심을 가진다. 지나치게 개념화된 철학은 사람을 자기 삶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마치 먼 곳을 향해 떠나는 기차처럼, 인간의 구체적인 감정과 고뇌, 실존적인 고민은 철학이라는 플랫폼 위에 홀로 남겨진다. 그렇기에 그는 철학을 삶에 다시 불러오고자 한다. 철학은 위로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실존적 고뇌에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실존철학’의 출발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이른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다. 니체는 대표적인 무신론 실존주의자다. 그는 기존 도덕과 종교를 ‘노예의 도덕’이라 비판하며, 인간은 신이 아닌 자신을 근거로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그의 철학은, 기존 질서와 가치관을 해체하고, 인간 스스로가 주체로 서야 한다는 급진적 요청이었다.

반면, 키에르케고르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대표한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 불안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신과의 관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종교는 억압의 도구가 아닌,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고 참된 자아에 이르게 하는 치유의 힘이다. 그는 도덕과 신앙이야말로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지혜의 약’이라 여겼다. 이 두 철학자는 같은 실존의 출발점에 서 있으면서도, 그 종착지를 전혀 다르게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중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가르는 일은 부질없다. 키에르케고르 자신도 철학이 반드시 추리와 논리로 해답을 내는 학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철학은 생명에서 출발해야 하며, 살아 있는 존재의 고통과 선택, 체험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살아보지 않고는 어떤 길이 더 낫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생명의 길’에는 수많은 갈래가 존재하며, 그 중 어느 길이 더 진실한지를 가늠하는 것은 살아 있는 개인의 몫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 점을 시적으로 풀어낸다. 석가모니는 “법문은 삼만육천가지가 있다”고 했다. 인간의 성품이 제각기 다른 것처럼, 진리에 이르는 길도 하나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길을 걷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철학에 바란 것도 다르지 않다. 추상적 명제 속에 갇힌 철학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에 응답하는 철학. 죽음과 절망 앞에서도 붙잡을 수 있는 철학. 그는 그런 철학을 원했고, 우리도 그런 철학이 필요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을 고통에서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단지 이론을 세우기 위해 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과 고뇌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당시 유럽은 체계적인 철학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철학자들은 세계와 인간을 수학 공식처럼 설명하려 했고, 인간 존재 역시 객관적인 체계 안에서 이해하려 들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그 접근이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숫자나 개념이 아닌, 고뇌하고 방황하는 존재이며, 삶의 실질은 그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질문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철학이 인간의 존재에 도움이 되려면, 인간의 실제적인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그의 대표적인 개념, ‘절망’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단순한 감정이나 우울증의 상태로 보지 않았다. 그가 말한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 또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만 의존해 살아가거나,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자신을 맞춰가며 정작 내면의 자아를 잃어버리는 상태—이것이야말로 깊은 절망이라고 보았다.

절망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다. 자신이 절망에 빠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가 가장 기초적인 절망이고, 자신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상태는 더 깊은 절망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가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자기 자신이 되려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이란, 그에게 단지 개념의 놀이가 아니라,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거울이자 자기 존재의 책임을 묻는 실존의 무대였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시작해, 철학을 개인의 자기 회복과 실존의 발견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