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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세이

비연애주의·비혼주의자에게 퀴어플라토닉이란? 새로운 관계의 형태

by 류선선 2025. 6. 19.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 나, 이상한 걸까?


요즘 나는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어서 고민이다.
한국 사회에선 연애나 결혼도 ‘때를 잘 타야 한다’는 분위기가 여전히 강하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감정이 없지만, 혹시 나중에 연애하고 싶어 졌을 때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자꾸 고개를 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연애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별로 들지 않는다. 연애하게 된다면 헌신하며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사실 우정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면 굳이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사람들은 흔히 외로움을 이유로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을 혼자서도 잘 다뤄야 비로소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 믿음 아래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 내면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나는 연애 없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성애 색상 하트


세상이 유성애(이성 간 성적 끌림을 중심으로 한 성적 지향)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건 안다.

미국은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하다. 연애하지 않는다거나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마치 외계인을 보는 것처럼 반응하는 분위기랄까. 미국인이 쓴 무성애에 대한 책을 읽으며 ‘미국은 정말 섹스 중심의 나라구나’ 하는 편견만 더 깊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그보다 훨씬 낫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다.

한국도 여전히 ‘우정’만으로는 안정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구성하기 어렵다.
결혼, 연애, 가족 같은 제도적 관계가 아니라면 인생의 주요 관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이다. 참 슬프고 막막한 일이다.


20대 초반의 나는 다른 사람과 연애나 섹스를 원하는 욕망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무성애자, 좀 더 정확히는 ✅데미섹슈얼(Demisexual)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 데미섹슈얼(Demisexual)

성적 끌림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정서적 유대감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성적 끌림을 거의 느끼지 않으며 시간과 신뢰가 쌓여야 욕망이 생김.
연애 감정은 있을 수 있고, 연애를 원하기도 함.


처음엔 단지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까다로운 편이라고만 생각했다.
성욕이 없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그 끌림을 행동으로 옮길 만큼 섹스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다는 점이 남들과 다르다.

나는 깊은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사람과만 그런 관계를 맺고 싶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과도 섹스하는 것이 몇몇 유성애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이 꽤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처음으로 ‘아, 나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서 조금은 벗어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사회의 평범한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사회학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조금씩 ‘사회와 사람 간의 관계’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 또렷이 자리 잡게 되었다.

“사회가 정답처럼 주입해 온 관계의 기준이 정말 옳은 것일까?”


어쩌면 이 세상이 너무 유성애 중심으로 짜여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굳이 무성애자라고 명명하지 않으면 설명이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이 동성을 좋아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동성애자야’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이 ‘그래서 너는 누굴 좋아해?’라는 질문 자체를 하지 않는 사회라면 성적 지향을 밝혀야 할 이유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연애하지 않거나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저 “그래? 알았어. 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 먹을거야?”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세상.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온다면 무성애라는 개념 자체도 언젠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는 지금이 아닐 뿐 반드시 올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왔을 때 나는 ‘퀴어 플라토닉’이라는 개념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기를 바란다.



✅ 퀴어 플라토닉(Queerplatonic)이란?

우정과 연애의 경계를 허무는 관계


표면적으로는 친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정서적 밀도 헌신의 깊이는 때로 연애 관계 못지않다. 어떤 경우엔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연애도 아니고, 섹스도 없지만, 서로의 삶에 깊이 얽히고 책임지고 돌보는 관계.
서로에게 ‘가족’ 이상의 의미가 있지만, 일반적인 사회적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관계.

이럴 때 우리는 상대를 ‘퀴어 플라토닉 파트너’라고 부른다.

이 관계는 성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친밀해지고 어떤 식으로 인생을 함께 할지를 선택하는 관계의 양식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무성애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연애 방식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 다른 형태의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 혹은 그냥 ‘지금은 연애가 아니야’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퀴어플라토닉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나는 연애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믿는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어떤 형식이든, 그 관계가 진심이라면.

그리고 언젠가 이런 관계들이 더 이상 이상하거나 낯선 것이 아닌 세상이 오길 바란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퀴어 플라토닉이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인 것 같다’라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도움이 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