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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세이

결핍 리스트 ①생일

by 청파란 2025. 5. 24.

 

결핍.

그리 유쾌한 단어는 아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결핍을 호소하며 채워달라고 남에게 매달리고, 어떤 이는 자신이 결핍을 있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다고 여겨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나는 한때 결핍을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어떠한 결핍이 있음을 인지하고 나면 지독한 자기연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 감각이 싫었다. 자기연민은 내 곁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믿음을 주고, 미래의 내가 더 나은 것을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정신 차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말인 걸 깨닫지만, 결핍의 존재가 주는 가슴이 텅 빈 느낌은 그것이 충분히 근거 있는 사실이라 믿게 한다. 그렇다고 결핍을 마주하지 않고 외면하느냐. 그건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나는 자기 내면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한 채 타인의 탓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며 반면교사 삼아왔다. 내면을 더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해하고 싶어 각종 심리학과 뇌과학, 정신건강 서적을 찾아 읽었다. 그래서 결핍을 마주하며 상처의 아픔이 재생되더라도 나는 끊임없이 나의 결핍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 과정은 나에게 무척 익숙해졌다. 그래서 자기연민에 허덕여 무척 괴로워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지금은 어떻게 잘 다독이고 넘어갈 수 있는지 안다. 그리고 나의 결핍을 안다는 것이 주는 놀라운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고, 그것들이 앞으로 내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많이 와닿았던 최근 일화가 있다. 나는 생일이었고, 우리 가정은 생일을 잘 챙기지 않는 분위기이다. 늘 케이크나 선물을 준비하기보단, 가족끼리 외식 한 번 다녀오는 것으로 끝내곤 했다. 나는 항상 그게 서운했다. 어린 나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선물을 골라 주기를 원했고, 생일 용돈도 좋지만 편지로 마음을 전해주시길 바랐다. 하지만 부모님 생신 때도 우린 늘 외식을 갔다. 거기다 어린 나는 돈이 없어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수 있는 능력도 없어서 내가 불만을 말할 입장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엄마가 여느 때처럼 생일 용돈을 주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용돈을 주며 "이걸로 생일은 땡이다?"라고 말했고, 나는 서러움이 북받쳐 엉엉 울었다. 그날 처음으로 아빠에게 생일 편지를 받았다. 그런데 눈물로 얻어낸 편지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원하는 것을 억지로 받아낸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받을만한 일인가? 내가 너무 별것도 아닌 일로 울었나? 자기 검열이 심하던 어린 날의 나였다. 그 뒤로 생일을 더 아무 날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신경을 끄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가 충분히 바랄 수 있었던 정도의 것들이라 참 안타깝다. 그렇게 결핍을 잊고 있던 어느 날, 생일을 맞아 여느 때와 같이 생일 용돈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선물을 해보자는 생각에 어렸을 때 원했지만 갖지 못했던 것들을 샀다. 첫 번째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는 늘 치즈 케이크를 사주셨다. 그런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하는 아이였고, 그 당시엔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TV 광고로 한창 나올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생일에 너무 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비싼 편이었고, 그래서 나는 치즈 케이크도 좋아한다고 속마음으로 되뇌며 치즈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샀을 때, 나는 놀랐다. 기분이 너무 안 좋은 것이다. 왜? 결핍이 채워지면 충만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어린 날의 서러움이 다시 떠올라 우울해졌다. 괜한 짓을 해서 기분을 망쳤나 싶어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 내 기분은 같이 사는 엄마도 느낄 정도였다. 엄마는 나에게 생일인데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해서 기분이 나쁘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생일과 관련된 서러움을 털어놨다. 그 해의 엄마 생일은 내가 케이크를 사고 노래를 불러줬기 때문에 서러움이 더 배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엄마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 엄마는 밥을 굶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목표인 어린 시절에서 자라왔고, 그래서 생일은 당연히 챙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거기다 경상도 장녀라 무뚝뚝하고 애정 표현이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충분히 생일을 잘 챙기지 않는 성향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는 본인 자체가 "기억"하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생일 용돈을 주고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사도록 하는 것이 충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었다. 나는 내년 생일엔 케이크와 꽃다발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졸업식에서 항상 사탕 다발을 받았던 것이 또 다른 결핍이었기 때문이다. 늘 다른 친구가 예쁘고 큰 꽃다발을 받을 것을 보며 엄청 부러워했다. 그리고 나도 엄마의 생일과 어버이날을 더 잘 챙기기로 했다. 엄마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을 슬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핍은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곤 한다. 그 과정을 넘기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견디기 힘들지만, 그래도 삶을 이런 데 써야지 다른 데 쓰면 아깝지 않은가. 어른이 되어서 먹은 아이스크림은 얼굴이 구겨질 정도로 너무 달았다. 단 것을 즐기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내년 생일에도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고 싶다. 나에게 아이스크림은 단순히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케이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한 가치와 의미는 개인의 추억으로 부여될 수 있음을 또 느낀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케이크 내돈내산 : 미니 골라먹는 와츄원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케이크 내돈내산 : 미니 골라먹는 와츄원

날씨가 너무 좋은 5월~ 5월에는 나의 생일이 끼어있다. 그래서 이번 생일에는 나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기로 했는데, 그 이유나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게시물에서 확인하시길.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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